동북아 정세와 서희의 리더십(2)
동북아 정세와 서희의 리더십(2)
  • 서울동북뉴스
  • 승인 2012.05.0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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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길 랑<비전경영전략컨설팅 대표>

1.한반도 주변 정세
  라.한국과 중국

 

▲ 명길랑
중국은 현영토에서 흥망성쇠를 했던 옛날의 모든 국가들의 역사를 중국의 정사(正史)로 본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우리나라를 가장 많이 침략한 나라다. 우리나라는 900여 차례 외침을 당했는데 그 대부분이 중국의 침략이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강대국인 중국이 약소국인 우리나라를 복속시키기 위해 침략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수나라 양제와 문제가 고구려를 침략했고, 당나라 이세민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안시성에서 대패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수차례 침략했다.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략했고, 몽골은 고려를 6차례 침략했다. 고려는 40여 년간 몽골과 싸웠다. 고려는 초토화 됐고, 백성들은 무수히 죽었다. 결국 고려는 몽골과 사대관계를 맺고 98년 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조선은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명과는 태조 때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요동정벌의 준비와 여진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가 있었지만, 태종 이후 양국 간의 관계가 좋아 지면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조선은 명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사대정책을 유지하였으나 명의 구체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다. 매년 정기적, 주정기적으로 사절을 교환하였고, 그 때 문화적,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명에 대한 이와 같은 사대 외교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 외교적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명이 조선에 대한 무력 침략은 없었다.
  청나라는 인조 5년(1627)에 침입하여 조선조정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철군했으며, 인조 14년(1636) 청태종이 침입하여 군신관계를 맺었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조선개항기에 청나라는 조선의 외교와 경제문제를 좌지우지했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우리나라에 대한 종주권을 잃었다.

  중국은 6·25전쟁 때 팽덕회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한국을 침략했다. 중공군의 침략이 없었다면 무력통일이 가능했었는데 기회를 무산시켰다. 중국의 우리나라 침략사는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현안으로는 동북공정과 이어도, 통상관계 문제가 있다.

  마.한국과 러시아(소련)
  러시아가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은 것은 고종 21년(1884)의 일이다.이에 의하여 서울에 온 러시아 대표 웨베르는 외교수완이 능란하여 궁궐에 자주 드나들면서 친러적인 세력을 키우기에 노력하였다. 이리하여 청의 지나친 간섭에 염증을 느끼던 조정에서는 친러적 경향이 점차 대두하게 되었다. 결국 조선에는 청·일·러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래서 러시아도 우리나라를 괴롭힌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러·일전쟁도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려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8월 9일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한·소 국경을 넘어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미국과 함께 우리나라를 분단 국가로 만든 나라이고, 6·25전쟁을 배후에서 조정한 나라다. 현안으로는 러시아 횡단철도 활용과 천연가스관 설치 문제가 있다.

  바.일본과 중국
  일본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거의 앙숙관계에 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누려왔던 종주권을 상실했고, 중·일 전쟁 때 일본의 만행은 중국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으며 중국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남경(南京)대학살 사건은 일본의 잔인함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2주~1개월 사이에 30만 명을 학살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사건에 못지 않은 학살을 했다.

그러나 일본은 부인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찍은 만행의 사진과 당시 인구 통계 등을 살펴 볼 때 남경대학살 사건은 분명한데도 일본은 이를 부인한다. 중국의 2세 미국인 아이리스 장(Iris Chang)은 그의 저서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에서 일본의 남경대학살사건을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아이리스 장은 이 책이 출판된 후 일본 극우 세력들의 협박을 당해오다 피살되었다.

  현안으로는 조어도(釣魚島)와 희토류 문제가 있고, 중국의 군사력 증강에 일본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사.일본과 러시아
  청·일전쟁 후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와 맺은 북경조약으로 우수리강 동쪽의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고 블라디보스크에 군항을 건설했다. 그러나 태평양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부동항(不東港)을 가질 필요가 절실했고, 그것을 한반도에서 구하려 했다.

  한편 조선정부는 청·일전쟁 이전부터 러시아 세력을 끌여들여 우선 청나라의 간섭을 벗어나는 외교정책을 지향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하자 민비세력 중심의 조선정부는 청·일전쟁 후 강화된 일본의 조선침략을 저지하는 방법으로 러시아 세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러 했다.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1895)을 일으켰다. 그 결과 조선의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이 일어났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이 유리해진 데 당황한 일본은 수세에 몰리면서 한반도 문제를 두고 러시아와의 협상을 시도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베베르·코무라 각서(1896.5)'와 '로바노프·야마가따 의정서(1896.6)' 등을 체결하여 반반도에서 러시아와의 세력균형을 도모하는 한편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러시아세력권에, 남쪽은 일본세력권에 두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관파천 후 러시아의 극동정책은 만주지역을 세력권으로 확보하는 데 치중하고 한반도를 일본과의 사이에 안전지대로 삼으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때문에 일본이 '로젠(Rosen)·니시(西)협정(1898.4)'을 통해 한반도에서 약간의 우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청의 의화단(義和團)사건(1900)을 계기로 러시아가 만주를 사실상 점령하게 되자 이에 크게 반발한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체결(1902)했다. 이것이 제1차 영·일 동맹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만주를 그대로 확보하기 위해 38도선을 경계로 그 이북의 한반도 땅을 중립지대로 하고, 그 이남에서 일본의 우위권을 인정하는 것을 제안했다. 영·일동맹으로 불리해진 러시아가 조금 양보한 안이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대 강국 영국과 동맹을 맺고 또 미국의 도움을 얻게 된 일본은 러시아 제안을 거부하고, 영국과 미국의 재정적 원조를 받아 결국 러·일전쟁을 도발했다.(1904.2~1905.5)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1917년 10월혁명에 성공하자 레닌은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를 중심으로 카프카스,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등 주변 소비에트 정부를 흡수하여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수립한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8월 9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든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승리한다. 그 대가로 일본의 북해도 북방 4개 섬을 차지한다. 러시아와 일본은 두 번의 전쟁에서 1승 1패였다.
 현안으로는 북방 4개섬 반환 문제와 러시아 천연가스 도입이 있다.(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17~20쪽

아. 일본과 미국
  1853년, 미국 폐리 제독이 군함을 몰고 동경만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일본은 처음에 사무라이 검으로 미국 해군에 대항했으나 미 해군의 육연발 권총을 맞고 쓰진 관경을 본 일본 집권층은 이를 계기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근대화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후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물을 꾸준히 받아들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러·일전쟁 때 일본의 후원국이었던 미국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태평양 전쟁을 치루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제2차 세게대전은 끝을 맺는다. 일본은 전범국가임에도 몇 명의 전범자를 처벌하였을 뿐, 큰 벌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의 국익차원에서 지정학적으로 일본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아시아 제국의 피침 국가에 대해 진실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미국의 비호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현안으로는 주일 미군기지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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