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다는 마담X에게(2)
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다는 마담X에게(2)
  • 성광일보
  • 승인 2017.06.2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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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논쟁 -
▲ 명 길 랑 / 천주교 서울평협 전 대외관계위원장

2.일본과 미국은 우리 민족을 어떻게 봤을까요.
일본은 우리나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아 발전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없었던 역사를 만들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했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이를 미국에 전파하여 미국의 지지를 받아 우리나라를 지배하려 했습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선각자'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오카쿠라 텐신(1862∼1913)인데 이 사람은 일본의 전통 미술뿐만 아니라 서양과는 다른 일본적인 동양사상을 유려한 영문으로 널리 외국인들에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존경과 숭모의 대상이 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오카쿠라가 남긴 영문으로 된 저서 중에서도《차의 책(The Book Of Tea)》,《동양의 사상(Ideals Of The East)》,《일본의 각성(Awakening Of Japan)》은 고전으로 일본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거의 필독서로 추천되고 있지요.
이 세권의 책 중에 1904년 러일전쟁 전야에 미국에서 출간된〈일본의 각성〉에서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시조 단군은 일본의 시조 아마테라스의 아우 스사노오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조선은 일본의 제14대 천왕 주아이의 황후 신공이 정벌군을 파견하여 삼한 땅을 정복했던 3세기 이후 8세기에 이르는 500년 동안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고유의 속주(Original Province)였으니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앞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재 지배한다 하여도 결코 침략이 아니라 역사적인 원상회복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조선의 고분에서 나오는 출토품들이 일본 고분의 출토품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것만 보아도 일본이 태고적부터 이미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 아닌가”라고 엄청난 역사의 왜곡을 하고 있으나,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사고를 미국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대통령 이하 정부 수뇌부의 머릿속에 심어주는데 부족함이 없는 논리였습니다.

또, 메이지 시대 '선각자'로서 오늘날까지 일본인들 숭상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이 니토베 이나조입니다. 니토베 역시 유창한 영문으로 쓴《무사도(Bushido)》라는 책을 1905년 미국에서 출판하였습니다. 니토베의 《무사도》는 일본인이 얼마나 고매하고 용감한 무사도(사무라이)정신을 이어받은 우수한 민족인가를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서술한 책으로서 그 때 막 러일전쟁으로 돌입한 일본에 대해 호의적인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 민족에 대해서 모멸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니토베는 그 배후 인물의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통감부의 촉탁으로서 조선 각지를 답사한 후“조선인은 풍모로 보나 생활 태도로 보나 도저히 20세기의 인종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원시적이며, 민족으로서 생존의 기한은 끝나고 있는 듯하다. 지금 조선 반도에 드리우고 있는 것은 죽음의 그늘이다”라고 보고(報告)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니토베의 저서《무사도》에 매혹되어 수십 권이나 구입하여 각료들과 정부 각 부처의 관료들에게 읽으라고 배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튼 루즈벨트 대통령 머릿속에 '놀라운 마셜스피릿(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우수한 일본 민족'이라는 개념과 '자기 자신의 방위를 위하여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머저리 같은 조선 민족'이라는 개념이 동시 진행형으로 침투해 가는데 오카쿠라와 니토베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두 사람의 역할이 일본의 국가 이익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했는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오늘날까지 일본 사람들이 이 두 '선각자'를 우상과 같이 숭배하고 있는지 이해할 만합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포츠머스 조약 체결을 앞둔 어느 날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 대표단의 일원인 가네코 겐타로를 백악관으로 불러 점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카리브 해 연안 지역의 쿠바를 미국이 지배하듯이 황해 연안의 지역의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은 이를 인정한다”고 말했습니다. (정경모. 시대의 불침번, 한겨레출판사, 2010. 306∼309쪽)

가네코 겐타로는 미국 제26대 대통령 루즈벨트와 하버드대학 동창입니다. 오카쿠라와 니토베 못지않게 일본인의 우수성과 한국인의 미개함을 미국 조야에 역설해 온 인물입니다. 일본 쪽 자료에 따르면 가네코 겐타로는“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해야 된다는 것을 미국 국민, 특히 워싱턴 당국에 납득시켰다”고 전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로비가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세뇌당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인을 자치능력이 없는 미개한 민족으로 취급했고, 이것은 미국 제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velt)대통령과 제33대 트루먼(Harry Truman)대통령까지 전수되어 해방 후 한국을 신탁통치 하려 했지요.

마담X! 일본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민족을 자치능력이 없는 미개한 민족으로 미국 조야에 각인시킨 것은 미국의 환심을 사서 우리나라를 지배하겠다는 야심이 깔려 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일본의 역사부터 보겠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8년 여름, 다섯 명의 다이로(大老)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다이로는 비상시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의 직책이었습니다. 다섯 명의 다이로 가운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습니다. 이에야스는 간토 지역에서 250만석을 소유한 히데요시 다음가는 다이묘였습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 1603년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동경)에 바쿠후를 세우고 쇼군 자리에 올랐습니다.

에도 바쿠후는 쇄국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바쿠후의 쇄국정책이 계속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853년 에도만의 '우리가 항'에 신형 대포를 장착한 4척의 검은 증기선이 나타났습니다. 미국의 매튜 페리(Mattew Parry)제독이 몰고 온 군함입니다. 페리 제독은 밀라드 필모어(Millard Fillmore)대통령의 국서를 쇼군에게 전하면서 미국과의 통상을 수락하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는데 결국 1854 일미 화친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후에도 에도 바쿠후는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1862년 어느 여름 날 당시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마쓰의 행렬이 요코하마의 교외의 한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가마를 호위하던 무사가 “길을 비켜라”하고 외쳤는데 말을 타고 가던 4명의 영국인이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행렬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다이묘 행렬이 지나갈 때면 길가에 엎드려야 하는 일본의 풍속을 영국인들이 알 턱이 없지만, 호위 무사는 그 자리에서 영국인 4명을 단칼에 베어 버렸습니다.

소식을 들은 영국 정부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영국은 바쿠후와 사쓰마 번 그 무사를 처형하고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바쿠후는 영국의 요구를 들어주려 했지만 하급 무사들이 사쓰마 번을 장악하고 영국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1863년 영국은 즉각 7척의 함대를 이끌고 사쓰마 번의 응징에 나섰는데 이것이 사쓰에이 전쟁입니다. 사쓰마 번의 군대는 영국의 신무기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쓰마 번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영국과의 대결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의 실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무능한 에도 바쿠후를 몰아내야 한다는 결론까지 도달했습니다.

한편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 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존왕양이 파는 교토의 구게(公家,귀족)와 손잡고 바쿠후에게 양이를 실행하도록 압박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쿠후는 1863년 6월 25일 양이 실행의 날로 삼을 것을 조정에 약속했습니다. 조슈 번은 6월 25일이 되자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상선을 포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반 바쿠후 세력의 구게와 사쓰마 번 무사들이 교토에서 존왕양이파 구게와 조슈 번 무사들을 추방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슈 번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교토로 출병했지만, 오히려 조슈 번을 공격하라는 덴노의 명령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일본 내 반서양 세력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는 바로 보복에 나섰습니다. 이것이 1864년에 벌어진 '시모노세키 전쟁'입니다. 연합 함대를 조직한 4개국은 17척의 군함과 5,0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시모노세키를 점령했습니다. 무력시위를 통해 일본의 지배층에게 양이를 단념하도록 압박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조슈 번은 연합 함대의 공격을 받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서구 열강의 위력을 깨달았습니다. 조슈 번도 사쓰마 번과 똑같은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자연스럽게 '양이'의 기치를 버리고 대신 '반 바후쿠 타도'라는 한 배를 타게 됩니다.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먼저 재정을 개혁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두 번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재정을 튼튼히 하면서 재정의 여유가 생기자 서양의 선박과 무기를 사들여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또한 비밀 동맹을 맺어 바쿠후의 공격을 받을 경우 서로 돕도록 관계를 돈독히 했습니다.

한편 에도 바쿠후는 급성장한 조슈 번을 굴복시켜 바쿠후의 건재함을 보여주고자 1866년 조슈 번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바쿠후 군은 조슈 군과 사쓰마 군의 샷초 동맹을 맺은 데다 그들이 가진 우수한 무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철수했습니다. 바쿠후의 권위는 더욱 추락했으며 조정은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무사들이 장악했습니다.

1867년 10월, 에도 바쿠후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조정 대신과 다이묘들을 불러서 쇼군 지위를 내놓았습니다. 1867년 12월 왕정복고가 선언되고 1868년 7월 신정부는 에도를 수도로 정하고 서쪽의 교토(京都)에 대응하여 도쿄(東京)로 지명을 고쳤습니다. 신정부는 중앙집권의 틀을 다각적으로 갖추어 나갔습니다.

이 무렵 서양의 역사와 제도, 문화 전반을 소개한 후쿠자와 유키치의《서양사정》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신정부의 지도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1871년 신정부는 외무경(외무장관)과 관리 46명, 유학생과 수행원 60여 명 등 총 100여명의 인원을 유럽과 미국에 사절단으로 파견했습니다. 이 사절단은 2년 동안 미국을 거쳐 유럽 곳곳을 둘러보고 돌아왔습니다. 사절단은 프랑스를 격파한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만든 독일 제국이 유럽의 강국으로 떠올랐고,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는 영국이며, 유럽 각국이 쉴 틈 없이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귀국 후 사절단은 각 분야에 걸친 구체적인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부 주요 부서에 전달했습니다.

정부는 사절단의 건의를 토대로 부국강병의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서구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으로 치닫게 됩니다.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민족을 자치능력이 없는 미개한 민족으로 매도한 것입니다.

한국의 근세사를 보겠습니다. 산업 혁명 이후 유럽의 자본주의는 급속히 발전하여 19세기 중엽부터 자본의 집중과 집적(集積)을 통한 독점 자본주의가 등장하였습니다. 독점 자본주의는 값싼 원료와 자국에서 생산한 상품의 시장, 그리고 잉여 자본의 투자 지역을 찾아 아직까지 자본주의가 성립되지 않았거나 미숙한 지역을 무력으로 식민지화 하였는데 이를 제국주의(帝國主義)라고 합니다.

일찍 공업화를 이룩한 영국과 프랑스가 제국주의 대열에 앞장섰습니다. 금융자본이 발달한 네델란드와 벨기에가 그 뒤를 이었으며, 국가적 통일을 달성한 독일과 이탈리아가 합세하였고, 미국도 남북전쟁 이후 제국주의 대열에 동참하였습니다. 뒤늦게 산업화를 달성한 러시아와 일본도 19세기 말에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조선에 대한 통상 요구가 빈번해 졌습니다. 인도양을 거쳐 동진하여 북상하는 영국과 프링스, 태평양을 건너서 서진하여 오는 미국, 시베리아를 거쳐 남진하여 오는 러시아 등의 여러 나라가 조선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순조32년(1832)에 영국 상선 1척이 충청도 해안에 나타나서 무역을 요청하였고, 헌종 11년(1845)에 영국 군함 1척이 다도해 수역을 측량하는 동시에 또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1846년에는 프랑스 군함 3척이 충청도 해안에 출현하였고, 철종 5년(1854)에는 러시아의 군함 2척이 함경도 해안에 와서 각지를 조사 측량하고 갔습니다.

고종 3년(1866)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가 두 차례나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고, 고종 3년(1866)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nal Sherman)호가 평양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외국 선박의 출몰은 국내외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던 조선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청(淸)이 아편전쟁·아로호사건 등의 서양인과의 충돌로 곤경에 빠져 있는 사실을 아는 조선은, 그들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청과 같은 곤경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쇄국정책(鎖國政策)입니다.

조선 집권층은 종주국(宗主國)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고도 세계의 변화에 둔감 했습니다. 지구상의 나라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는지, 국제적 힘의 중심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무지(無知)했으며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순조 32년(1832)이나 헌종 11년(1845)에 영국과 수교를 했거나, 고종 3년(1866)에 미국과 수교를 하였다면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서구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뜻있는 선비들이 순조 32년부터 선진국과의 교역을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집권층은 이를 외면하고 기득권 수호에 전념했습니다. 뜻있는 선비들의 주장대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일본의 오카쿠라 니토베, 그리고 가네코 겐타로 등에 의해 우리 민족이 자치 능력이 없는 미개 민족으로 미국 조야에 각인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일본의 식민지배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남북 분단의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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