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희망고문”과 “희망행복”
<빛과 소금> “희망고문”과 “희망행복”
  • 성광일보
  • 승인 2017.04.1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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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범 목사/왕십리 성은교회
▲ 최민범 목사/왕십리 성은교회

참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만났습니다. “희망”이란 단어와 “고문”이란 단어 말입니다. 어쩌다가 “희망”이라는 이 고귀한 단어가 “고문”이라는 불행한 단어와 사귀어 결혼까지 하여 “희망고문”이라는 슬픈 아이를 낳았을까요?

“희망고문”이란 단어는 JYP의 대표 박진영이 그의 책 러브에세이 “미안해“ 중에 언급한 단어입니다. 희망고문이란 사전적인 의미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될 것 같다는 희망을 주어서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 “거짓 희망”(false hope)이고, “헛된 희망”(vain hope)입니다.

박진영의 글처럼, 남녀사이에 서로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사이라면, 상대방에게 절망이 되더라도 사실대로 말해주어서 공연한 기대를 하지 못하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잘 될지도 모를 작은 가능성의 여지를 보여주는 것이 “희망고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고문은 사람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희망고문”이라는 단어가 확장되어 사용됩니다. 로또를 구입하고 주말의 희망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곧 좌절을 겪곤 하니 “희망”일지라도 “고문”입니다. 아무리 “잘 될거야!” “아자! 아자! 파이팅!”을 연발하고 “자기 주문”을 하고 “긍정의 힘”을 사용하여도 소용없습니다. 곧 희망은 고문이 되어버립니다. 주식에서는 현재 큰 손실을 보고 있지만 팔지 못하고 “내일이면 잘 될거야” 라고 희망을 스스로에게 준다고 할지라도 곧 절망이 되어 상장폐지까지 된다면 “희망고문”은 처음부터의 절망보다 더 깊은 절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희망의 사다리”를 높이 올라도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희망고문” 이라고 느껴질 때 좌절은 더 커져서 추락의 높이만 더 깊게 할 뿐입니다. 희망의 사다리에서 뚝 떨어져 버릴 때 충격과 아픔이 더 쓰라릴 뿐입니다. “희망고문”입니다.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대학가서 놀자”라고 희망의 현수막을 붙여놓아도 정작 대학생이 되고 청년실업과 취업재수와 직장 초년생의 비애를 맛보게 되면 믿었던 “희망”들도 더 큰 “고문”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에서 정규직이라고 하는 희망의 '파랑새'를 잡을 수 있다고 희망하라고 하지만, 정작 청년들이 듣게 되는 소식은 정규직은 어렵게 되었다. 돈도 기대하지도 말고 “열정 페이(熱情 Pay)”하라는 '희망 고문'의 말 뿐이기도 합니다.

희망고문의 헛된 희망과 진짜 희망은 비슷해 보여서 잘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구별합니까? 희망의 출처로 구분합니다. 뿌리로 구분합니다. 희망의 출처가 “거짓과 부정”이라면 그 “희망”의 찬란한 언어조차 “고문”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희망의 출처가 “정직”과 “사랑”과 “평화”라면 우리는 “희망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널 봐줄게” “내 라인으로 들어와!” “내가 책임질께”의 언어가 아무리 화려해도 “거짓과 부정”이라면 그 아름다운 희망의 언어조차 “고문”입니다. 부도수표입니다. 헛된 공약 남발입니다.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구해주겠다는 거짓 희망을 주면서 빨려 들어가는 깊은 침몰하는 배 속에서 탈출을 시도하지도 못하게 하는 행위가 희망고문입니다. 결국은 도와주지도 않을 것을 헛된 희망은 왜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헛된 희망”이 많습니다. “희망고문”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진정한 소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은 “희망고문”처럼 부도수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은 수치를 당하게 될 헛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도난 희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망으로 치닫는 희망고문이 아니라 참된 희망을 말씀해 주십니다.

희망이란 단어가 “사랑”이란 단어를 만나면 “희망행복”이 피어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주신 희망은 대가를 지불하신 사랑입니다. 그 대가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내어주는 사랑은 거짓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고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희망이요 참 희망이며 희망행복입니다.

봄이 왔습니다. 목련도, 개나리도, 벚꽃도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이제 희망의 봄만 남았습니다. “희망고문”이 아닌 “희망행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속히 오세요. 희망과 행복의 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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