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 성광일보
  • 승인 2016.12.3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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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주화의 한계: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천안문
▲ 소치형 교수/·건국대학교 정치학 박사(국제정치전공),·건국대·호남대 교수 역임,·현 동북아 연구원 원장

덩샤오핑의 개혁파가 주도하여 추진해 왔던 문호개방정책은 중국사회 내부에서 새로운 경향을 야기하였다. 그것은 외래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띤 '부르주아 자유화' 물결이 차츰 침식해 왔던 것과 사회주의체제를 뒷받침해 주었던 사상적 및 이념적 기반의 핵심이던 인민군중의 신념이 동요되었음을 뜻한다.

일부 지식인들의 '서구 민주주의' 주장과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도 사회적 분위기를 일부 대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생들의 소요가 1986년 가을부터 출현하여 겨울 동안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다.

이들의 시위에서 나타났던 공동 관심사도 지식인들의 요구와 비슷하게 민주, 평등, 자유, 인권, 언론자유, 다당제, 개혁 옹호 등으로 표출되었다. 당시 인민군중은 사회주의체제와 공산당의 지도 그리고 사회주의의 미래 등에 관해서 이른바 '신념에서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덩과 개혁세력은 개혁·개방정책을 순조롭게 추진하기 위하여 정리정돈 작업을 추진하였다. 당·정·군 간부 60여만 명과 부부장급 이상의 고급 간부 1천여 명이 그 대상이 되었다. 3년 반에 걸친 숙청을 위한 정치동원의 결과 1987년 5월 이후의 통계에 의하면, 당적 박탈된 자 33,896명, 당적 등록 보류자 90,069명, 당적 등록 지연자가 145,456명, 그리고 경고 등 문책을 당한 자가 184,071명에 달했다.

한편 덩은 언론을 통해“정치적 안정과 단결은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다. … 만일 다른 의견이 있다고 해서 과격한 행동을 취하면 안정과 단결에 영향을 미친다.”, “당의 지도와 사회주의원칙 아래에서만이 정치개혁과 민주화 논의가 가능하다.”는 당의 입장을 강력하게 천명하였다. 덩은 당 내외의 부정적인 사상 및 이념의 확산을 방지하고, 자유화를 주장하는 지도급 인사들과 인민군중과의 연계를 차단시키기 위해서 언론과 당을 정치동원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 중앙은 덩이 앞서 지적한 데에 따라서 당원으로서 자유화운동을 주도해 왔던 주요 인물들을 당으로부터 추방하였다.

주요 인사를 보면, 팡리즈(方勵之)는 중국과학기술대학 부교장직에서 해직되면서 당적을 박탈당했고, 상해시 작가협회 이사(王若望)와 중국작가협회 부주석(劉賓雁)도 각가 당적이 박탈되었다.

그리고 당 선전부장(朱厚澤)도 교체되었으며, 이들 지식인의 작품을 집중 보도해 왔던 상하이의 <사회보(社會報)>도 정간 조치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89년 1월부터 중국사회과학원 마르크스·레닌·모택동사상연구소 소장(蘇紹智), 정치연구소장(嚴家其)을 비롯한 팡리즈 등 저명한 진보적 지식인들이 정치범의 석방을 요청하는 서한을 덩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1090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사망에 즈음하여 베이징에 있는 대학생들의 추모행사가 계기가 되어 촉발된 가두 시위는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안문 광장에서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광범위한 인민군중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여기서 당시 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의 역할은 이미 끝나게 되었고, 이후 그는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의 반발과 저항 그리고 주위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질적으로 실각된 것은 6월 4일이었다. 덩을 비롯한 보수파 지도자들이 무력진압이라는 강경책을 선택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민주화의 요구는 무산되고 말았다.

덩샤오핑은 중국 개혁·개방정책의 설계자였고 조타수였다. 그의 일념은 사회주의 강대국 건설이었다. 그에게 있어 가난한 공산주의의 평균주의를 버리고 부유한 업적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그는 중국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처해있는 바, 정치 및 경제체제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전제 아래 누구나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선부론', '시장'과 '계획'의 접목을 통한 '사회주의 시장경제', 각종 사회주의 규제의 완화 및 철폐와 상품경제 도입, 개혁 및 개방정책에 대한 인민의 광범한 지지를 얻기 위한 '남순강화' 추진 등은 강력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덩의 현대화정책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발전과 성장으로 '붉은 자본주의'가 지구상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덩의 '사회주의현대화' 실천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인치(人治)의 속성이 강한 나라이다. 물론 법치(法治)가 제도화되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중국의 전통인 중국적 '인치'의 잔영(殘影)은 현 집권자 시진핑(習近平) 리더십에서도 잔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중국인들이 그가 표방하는 '중국인의 꿈(中國夢)'을 꾸는 동안은 '중국적'이라는 수식어가 늘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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